길이 이야기(Giri'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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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테크 기업의 함정

길이 2007. 10. 5. 09:43
전통적으로 하이테크 기업들은 잘 만들면 팔린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첨단 기술력을 바탕으로 경쟁사들을 압도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내면 항상 시장은 따라온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관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주 혁신적인 제품이라면 그것을 파는 데는 어떠한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 CEO가 한 말이다. 하이테크 기업에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좋은 제품은 팔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PC, 인터넷보다도 위대한 신비의 발명품”이라고 격찬을 받았던 세그웨이(Segway)도 이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제품이었다. 2001년 미국의 한 발명가가 만들어낸 이 제품은 전기로 움직이는 2륜 스쿠터다. 사람이 선 채로 운전하지만 발판에 부착된 센서가 절대 쓰러지지 않게 조절해 주고 무엇보다 전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소음이 거의 없고 배기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이다. 출시 초기부터 “미래 자동차를 대체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기술”이라고 평가를 받았었고 무엇보다 스티브 잡스나 제프 베조스 같은 거물들이 성공을 장담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발명품의 판매 실적은 어떨까? 판매 2 년간 고작 육천 대 판매에 그쳤고, 2004년에 이르러서야 글로벌 판매 실적 1만대를 간신히 넘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마케팅이 이류면 일류 기술도 무용지물

세그웨이는 물론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기술의 혁신성과 시장의 논리는 조금 다른 문제다. 세그웨이 제조측은 판매를 앞두고 시장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이슈를 검토하지 않았다. 세그웨이의 속력은 도로에서 타기에는 너무 낮았고, 보도 위에서 타기에는 너무 빨랐던 것이다. 그로 인해 미국의 일부 대도시에서 세그웨이의 사용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세그웨이가 실패한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가격과 유통망, 프로모션 전략에 있었다.

세그웨이는 한 사람만이 올라탈 수 있다. 예전에 유행하던 스카이콩콩을 연상하면 된다. 그러나 가격은 원화로 오백만 원이 넘는다. 오백만 원으로 젊은 소비자들은 무엇을 사고 싶을까? 혼다에서 나온 멋진 스쿠터를 살까, 아니면 자전거보다도 느리고 여자 친구를 뒷자리에 태울 수도 없는 세그웨이를 살까?

그렇다면 교외 도시에서 여유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장년 소비자들을 공략하는 방법을 고려해보았을 법도 하다. 그러나 세그웨이 제조사는 이들 소비자에게 새로운 사용 가치 혹은 패턴을 알려주는 데 실패했다. 그냥 동네 한 바퀴 도는 것 외에는 세그웨이의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세그웨이는 멋진 제품이었지만, 소비자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통 생각해내기 어려웠다. 기술은 일류였지만 마케팅은 이류였던 셈이다.

소니(Sony)의 지능형 로봇강아지 아이보(AIBO)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보는 주인의 명령이나 움직임에 적절히 반응하고, 블로그를 쓰거나 눈의 뒤에 장착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재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 동안 기술 소니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언론의 관심과 메니아 층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판매는 부진했고, 결국 올해 초 아이보 생산 중단 결정이 내려졌다.

반면 미국의 아이로봇(iRobot)사는 고객 조사를 토대로 지능형 로봇에 대한 시장의 수요는 매우 작다고 판단해, 연구 개발의 대상을 일상업무나 단순 작업, 인간에게는 위험이 많은 일을 해내는 로봇 청소기에 집중하여 대 성공을 거두었다.

로봇은 대부분의 전자 업계 종사자가 인정하는 미개척 영역이지만 이것을 시장의 문턱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는 마케팅의 관점이 개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20년 넘게 로봇 기술을 연구하던 일본 기업들이 보지 못한 시장 기회를 미국의 조그만 벤처 기업이 발견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기술은 시장 창조의 도구일 뿐, 시장 창조의 기회는 마케팅의 눈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하이테크 기업이 빠지는 다섯 가지 함정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하이테크 기업들은 아직도 기술이나 제조 중심의 블랙박스(Black Box)적인 시장 접근법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내부 R&D가 강한 기술 지향 기업일수록, 기술을 통한 성공 경험이 많아, ‘기술=성공’이라는 성공 공식이 기업 전반에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경우 기술력에 비해 마케팅 역량은 매우 낮은 편이다.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역량이 내부적으로 축적되지 않았고 기술만 있으면 된다는 조직문화가 관성이 되어 마케팅 조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하이테크 기업들은 점차 시장 지향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게 되는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 상품기획은 엔지니어의 몫

고객의 니즈에 기반한 제품이 나오려면 제품의 초기 컨셉 단계에서부터 시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만약 고객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마케터들의 의견이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합의되는 세부 프로세스가 없다면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나오기 어렵다. 흔히 하이테크 기업들은 제품의 실물모형(Mockup)이 나오고 나서야 마케터들에게 프로모션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게 되는데 이런 경우 고객이 외면하는 제품이 나오기 십상이다.

초대형 대박으로 알려진 모토롤라 레이저는 상품기획의 패러다임을 바꾼 제품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 동안 휴대폰 시장은 얼마나 많은 기능과 첨단기술을 넣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며 경쟁 대상이었다. 반면 레이저는 그 동안 소비자들은 신기술에 민감하다는 것이 통념이었지만 과연 그런 것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쉽게 휴대할 수 있도록 하는 편리성이 최우선이었고 기능들은 보통 소비자가 휴대폰 하면 생각나는 기능들로만 최소화한 것이 성공의 핵심 포인트이다.

● 운(運)에 의존하는 제품 개발

제품 개발은 언제나 모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모험이 ‘감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도박사들은 확률의 전문가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되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검증을 통해 좀 더 제품 개발의 확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 마케팅의 관점이다. 그러나 하이테크 기업들의 신제품 개발은 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다. 최선을 다해 제품을 개발했으므로, 그것이 비록 시장에서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다음 기회에 더 큰 히트를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모토롤라의 이리듐폰은 신기술개발에 도취되어 고객 입장에서의 효용성에 대한 검토 없이 출시되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모토롤라는 이를 계기로 구매자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훨씬 재미있으면서 유행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최신의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고객을 유인하지 못한다는 확고한 기업 문화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 고객과 만나지 못하는 마케팅 조직

하이테크 기업의 경우 흔히 본사에 있는 개발이나 R&D 중심의 사업부서 위주로 사업이 돌아가다 보니 시장의 접점에 있는 세일즈나 마케팅 조직은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판매 목표도 본사의 사업부가 할당하고 현지의 판매조직이 이를 소화하는 형식이어서 항상 과부하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마케팅 세일즈 조직이 고객 트랜드와 경쟁사 동향 등과 같은 시장의 전략적인 정보들을 조직에 내재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세일즈 마케팅 조직의 사기가 저하되고 본사는 현지 조직을 불신하게 되는 풍토가 생겨날 뿐만 아니라 사업 의사결정에 중요한 핵심 정보가 조직 내부에 축적되지 못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 시장 조사에 대한 깊은 불신

많은 하이테크 기업의 경영자들은 시장조사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 그리고 이를 반영하여 신제품을 내놓고 있는데도 80% 이상이 실패하게 되는가 하고 반문하곤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하이테크 산업의 진화단계를 고려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출시되는 신제품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매년 미국에서만도 3만개 이상의 소비재 관련 신제품이 쏟아진다. 그리고, 과거대비 유사제품이 훨씬 많아졌다. 정보의 확산에 따라 경쟁자들의 대응이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기업들이 사전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흔히 하이테크 기업의 경영자들은 고객이 기술을 모르기 때문에 고객에게 물으면 항상 뻔한 대답만 나온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컨셉 단계의 사전조사 보다는 프로모션을 위한 시장조사에만 집중한다. 만약 과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조사방법에 있어 문제가 없었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 조직간의 장벽

제품 사업부간은 물론이고 다른 기능 조직들과의 장벽이 형성되어 R&D, 개발, 마케팅 등의 자원이 효과적으로 투자되지 못하는 경향들이 많다.

한 때 소니도 이런 문제가 성장 정체의 주된 원인임을 직시하고 사업부와 기능조직간의 협업을 강화하는 형태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예컨데 ‘플레이스테이션3’의 경우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컨텐츠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홈일렉트로닉스 그룹이 소프트웨어 및 디스크와 광 픽업, 그리고 반도체 그룹이 핵심 칩을 개발하는 등 세 개 사업 그룹과 마케팅 조직의 효과적인 합작으로 성공적인 출시를 일구어 내었다.

내부의 마케팅, 세일즈, 개발의 기능조직들과 사업부의 의사 조율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마케팅 주도의 기획 조정 작업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마케팅이 소극적인 역할 수행에서 벗어나 사업부와 여타 기능부서들을 설득하고 통일성을 일구어 내는 내부 마케팅(Internal Marketing)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시장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이테크 산업은 과거 30년간 두 자리 수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1조 달러 시장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하이테크 산업의 성장세는 둔화되고 있고 향후에도 5~6%로 성장 속도가 완화될 전망이다. 이제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고객을 먼저 이해하고 가치를 만들어서 전달하는 빠른 순발력이 어느 때보다 하이테크 기업에게 중요해진 것이다.

● Make & Sell에서 Sense & Respond로의 사고 방식 전환

이미 선진 IT 기업들은 마케팅 역량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성장의 모멘텀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만들어서(Make) 판다(Sell)의 사업방식에서 고객의 니즈를 빠르게 지각(Sense)하고 제품화해서 효과적으로 프로모션(Respond)하는 사업모델로 전환하고 있다.

마쯔시타의 경우에도 2002년도에 제조 관점이 아닌 고객관점에서의 동질성을 근거로 사업 조직을 개편하고 Panasonic 마케팅 본부를 설립하는 등 마케팅에 강력한 상품기획/가격 결정 권한을 부여하면서 침체기를 벗어 나가고 있다.

모토롤라도 2003년 신임 CEO가 부임하면서 “모토롤라에 부족한 것은 기술력보다 고객”이라는 모토로 아이콘 디바이스(Iconic Device) 즉 고객이 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디바이스를 만들자는 비전을 공표하고 2년간 레이저 폰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성장의 이니셔티브를 만들어 내었다.

● Cross Functional 업무의 강화

하이테크 기업이 시장지향적인 마케팅 활동들을 하지 못하는 주된 원인은 제품 개발과 판매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마케팅의 역할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R&D에 제한된 기업의 가치 창출 활동들을 마케팅을 비롯한 여러 부서들에 개방하고 이들 간의 적극적인 Cross-Function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기술이나 연구개발 중심의 상품기획 활동, 원가 중심의 가격 결정 관행, 분산(Silo)된 프로모션 활동들을 모두 시장 관점에서 일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세그웨이, 아이보의 사례에서 보듯, 공급자 관점의 마케팅으로는 시장수요의 캐즘(Chasm)을 뛰어 넘을 수 없다. 초기 시장은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중시하는 얼리어답터들 중심으로 형성되겠지만 캐즘을 넘어 본격적인 주류시장(Main Street)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다수의 실용적인 구매자들이 비로소 물건을 사주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타깃 고객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가격에 무슨 가치를 제공하고 또 어떻게 소구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 소비자와 함께 진화하는 마케팅

특히 유비퀴터스 네트워크의 도래로 소비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중단 없이(Seamless Connection) 알아볼 수 있게 되고 공급자들의 정보 공유 및 소비 모방 활동들도 더욱 가속화되게 되었다.

소비자들이 이처럼 빨리 변화하는 가운데 마케팅이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매스마케팅 관점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 마케팅은 고객 접점으로 전진 배치되어야 할 뿐 아니라 시장 변화를 민감하게 모니터링 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시장의 정보와 변화들을 직접적으로 감지하고 조직 전체가 이를 중심으로 변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지금까지 마케팅이 제조와 기술 뒤를 따랐다면 이제 마케팅을 중심으로 기술과 제조가 변화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로 알려진 P&G는 오히려 그들이 R&D가 강한 회사라고 말한다. 대신 R&D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마케팅이라고 한다. 이 말이 기술 중심 함정에 빠지기 쉬운 우리 기업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LG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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