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이야기(Giri'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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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실험 삼가야 한다

길이 2008. 2. 4. 14:54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 대접을 받으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선 시장에 대해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시장의 실패, 정부의 역할 같은 촌스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지식인 자격이 없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문제의 해결사라는 믿음에 털끝만큼의 흔들림이 있어도 안 된다.

또한 지금 우리 경제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성장률은 반토막 나고 한국경제는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왜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반기업적 정책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분명한 답을 이미 찾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측면에서는 평준화와 3불정책을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평준화만 깨면 학력이 바로 향상되고 사교육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고 점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는 저소득층이 평준화로 말미암아 손해를 보고 있다는 믿음도 필요하다. 그리고 대학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원흉은 3불정책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한 가지 필수조건은 영어를 잘하는 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믿음이다. 영어강의 비율을 높여야 우리 대학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세계 시민이 되려면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배워야 한다는 선구자적 비전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하자는 화끈한 자세도 지식인답게 보이는 데 도움이 된다.

주택문제는 시장에 내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건설업자가 어떤 집을 지어 얼마에 팔든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누가 주택을 몇 채나 갖고 있든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 아니다. 집을 더 짓지 않는 한 집값 상승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 이런 말들을 자신 있게 할 줄 알아야 지식인처럼 보인다.

한층 더 중요한 조건은 종합부동산세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집 한 채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이 과세대상의 38%나 된다는 데 분노를 느껴야 한다. 과세대상 주택의 90%가 다주택 소유자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식인답지 못하다. 또한 세금을 부과해 보았자 집값은 꿈쩍도 않는다고 비웃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약간의 과장이 있지만, 지금까지의 말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최소한 지도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론을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언론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막강한 영향력은 이제 거의 온 국민의 생각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그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만용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렸다.

현실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그들의 지적에는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부 지식인의 태도는 독선에 가까울 정도다. 본질적으로 정책과 관련된 문제에서 정답은 존재할 수 없다. 정답을 알고 있는 듯 말하지만, 사실은 아직 검증도 되지 않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데 불과할 뿐이다.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각 방면에서 대대적인 실험이 시작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실험들이 성공을 거두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섣부른 실험이 더 큰 비효율성과 혼란을 가져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개혁을 표방한 변화가 개악으로 끝나버린 숱한 사례가 과연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

(출처) 한겨레신문 /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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